- 1987년 6월 -
* 이한열 *1966년 8월 29일 전남 화순군 출생
*1987년 7월 5일 (향년 20세) 사망
*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1987년 6월 10일 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스물두 살의 청년 이한열은 군부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힘없이 쓰러졌다.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에 참여하고 있던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두개골 골절과 뇌손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합병증으로 결국 사망하였다.
이한열이 피격 소식에 많은 시민을 분노했고 거리로 나와 군부 독재정권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이 사건은 박종철 고문 사건 이후 발생한 일이어서 국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여 시위가 계속되면서 이른바 6월 민주 항쟁의 정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전국을 가득 메웠던, 그날의 함성,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시민의 목소리, 이 땅의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대해 이야기 한다.
* 정권 유지에 불안감을 느낀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 발표내용 *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한다고 선언하면서 제5공화국 헌법으로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및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하고 개헌 논의를 서울 올림픽 뒤로 미루겠다고 밝혔다.
* “호헌철폐 독재 타도“ 이한열의 마지막 외침
호헌철폐 독재타도 6월 항쟁을 가득 메운 외침이자 이한열이 스러지기 전 내뱉었던 마지막 구호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는 내용, 즉 호헌을 선언하며 장기집권의 야욕을 드러낸다.
시민들에게는 군부독재의 연장 선언과 다름이 없었다.
6월 항쟁의 이유가 된 호헌조치, 시민들이 저항한 당시의 헌법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속에 어떤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는지 역사저널 그날에서 살펴본다.
* 호언 조치 *
(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당시의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개헌 운동과 관련된 논쟁을 종식 시키고 기존 헌법을 고수하겠다고 발표한 특별담화이다.)
* 같은 시기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밝혀지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호헌철폐와 독재 타도를 위한 민주화운동이 벌어졌고 이는 6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 호언 철폐 *
호언 철폐는 전두환 정권 당시의 헌법을 지키는(호헌) 것을 중단하고 헌법을 개정하라는 뜻이다.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 선거가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였기 때문에 군부정권의 장기집권이 지속될 수 있었다.
호헌조치로 인해 시작된 민주화운동이 기치는 ”호헌철폐“와 ”독재타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호헌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해 6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야당과 재야 세력은 결합해 1987년 5월 27일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를 결성했다.
결국, 이 조치는 6.29 선언을 통해 철회되었다.
*분노한 시민들 시작된 6.10항쟁
피격된 이한열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나 전두환 정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한열이 피격된 다음 날인 6월 10일 오전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고 노태우 대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같은 날 동아일보에 피격된 이한열의 사진이 실리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움츠렸던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고 역사의 시간을 바꾼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우연을 역사로 바꾼 명동성당의 그날
6.10 국민대회는 하루에 그치지 않았다.
전경들의 강경 진압이 시작되자 시위대는 명동성당 안으로 피신했다.
수천명의 전경들이 성당을 포위해 시위대를 압박했지만, 시위대는 시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6일간 농성을 이어갔다.
우연을 역사로 바꾼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순간들을 역사적 그날에서 재조명해보았다.
*비상계엄령, 이번엔 쓸 수 없었던 카드?
전두환은 부마항쟁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이미 두 번의 비상계엄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시위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번에도 전두환은 계엄령 카드를 꺼내 들려 했다.
6월 18일에 벌어진 최루탄추방대회 다음 날, 전두환은 안기부장과 군 수뇌부를 불러 비상조치를 전제로 한 군병력의 배치 계획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다.
실제로 부산, 대구, 광주 등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령 계획 지시를 준비한 문서까지 발견되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는데...
전두환이 비상계엄령을 내리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불의에 맞서 투쟁했던 그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