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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리더의 눈물과 선택 그렇게 성군이 되다 넘버3 출신 성종이 만든 조선 인육치료법 단지 할고

채민플라워 2022. 2. 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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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49

2022227일 일요일 밤 1030분 방송

 

# 리더의 눈물과 선택, 그렇게 성군이 되다

 

넘버3 출신, 성종이 만든 조선

 

 

2022년 대선을 10여일 앞둔 시점, 조선의 성군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을 고찰한다.

성종은 제가의 원리에 충실하여 사랑하는 아내를 희생하여 정치적 모범을 추구했다.

성종은 언론을 존중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달게 수용하였고, 극단적 정치적 갈등보다 신구 정치세력의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근간을 닦았다.

주연이 아닌 조연의 리더십의 가치를 성종을 통해 조명한다.

 

 

# 성종 #

(조선 9대왕)

 

본 명: 이혈

휘 : 혈(娎)

시 호: 강정인문헌무흥성공효대왕

재 위: 1469년~1494년

출 생 지: 조선 한성부 세자궁

출 생 일: 1457년 7월 30일

사 망 일: 1494년 12월 24일

 

 

# 조선 제 9대 왕이자 세조의 큰아들 덕종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혈.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7년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는데 친정을 시작하면서 훈신 세력을 견제하고자 신진사림 세력을 등용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경국대전)의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485년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대전속록)을 편찬했다.

재위기간 동안 불교를 통제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숭유억불정책을 철저히 시행했다.

국방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압록강 이북의 건주 야인의 본거지를 정벌하고, 두만강 이북의 우디거 부락을 소탕했다.

(다음백과 출처)

 

# 넘버3 출신 성종, 성군이 되다

 

조선 왕실의 여성 지식인이자 정치자 인수대비의 아들...

 

 

최초로 사약을 받고 죽은 왕비 폐비 윤씨의 남편. 폭군의 아이콘 연산군의 아버지...

 

# 폐비윤씨 #

 

폐비 윤씨는 조선이 제9대 국왕 성종의 계비로서 공혜왕후 한씨에 이어 왕비가 되었지만, 연산군을 낳고 나서 호색한 남편 때문에 고심하다 투기를 빌리모 폐출된 뒤 사사되었다.

아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제헌왕후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중종반정 이후 삭탈되었다.

(다음백과 출처)

 

 

강력한 주변 인물들 때문일까?

성종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연보다 조연으로 기억되곤 한다.

성종의 묘호 은 나라를 잘 이룬 왕에게 붙여지는 자이다.

혼란한 시기에 성종은 유교의 나라, 조선의 기틀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왕위 계승 3순위에서 하루 아침에 왕이 된 소년 왕은 어떻게 유학 군주로 성장해 나갔을까?

 

# 조선시대 대 유행한 인육치료법

 

 

 

조선엣 효성 깊은 청년들은 이것이 없기도 했다는데, “이것의 정체는?

바로 손가락이다.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 허벅지를 살을 베어내는 할고에는 자신의 살과 피를 이중한 환자에게 먹여 낫게 하려는 조선시대 인윤치료법이 이었다.

과연 효과는 어땠을까?

 

 

단지, 할고는 특히 성종대를 기점으로 유행했다.

심지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위인의 어머니도 단지를 했다는데...

성종 시기에 무시무시한 치료법 단지. 학고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 이유를 알아본다.

 

# 성종 왕이 된 남자

 

 

예종 승하 당일, 왕의 조카였던 서열 3순위 잘산군의 즉위식이 치러졌다.

세자 교육 없이 왕이 된 소년의 고군분투 제왕학 수련이 눈물겹다.

할먼니의 수렴청정 기간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요즘 고3과 같은 학습량을 감당하며 군주로 거듭나고자 했던 성종, 그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무엇이었을까.

7년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시작한 성종...

 

 

부인 윤씨의 투기와 비행으로 곤란한 상황을 겪는다.

결국 성종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전을 폐출시킨 후 3년 뒤엔 사약까지 내린다.

남편이 아니라 왕으로서, 유교화 교과의 동반자로 간주했던 부인에게 사약을 내리기까지 어떤 고죄를 느꼈을까?

 

# 언론 존중의 신념으로 유교 정치의 꽃을 피우다

 

 

경연은 조선시대 국정 의사 결정을 하는 토론의 장이었다.

성종과 그의 롤모델이었던 세종의 경연 스타일로 비교하며 두 성군의 토론 리더쉽 스타일을 비교한다.

성ㅈㅇ은 아니 되옵니다라는 비판도 달게 받으며 언로를 활짝 열겠노라 선언했다.

시도는 좋았지만, 훈구와 사림의 대결은 극심했다.

언론의 지엽적이고 극단적인 비판조차 경청했던 성종...

그는 세상을 뜨기 전까지 마치 두 마리의 호랑이(언론과 대신들)가 싸우는 것 같다며 자탄했다.

이 같은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언론을 존중하며 추구했던 유교적 왕도정치의 실체를 살펴본다.

성군 성종의 새로운 발견~

 

2월 27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방송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 성군 성조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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