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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추사 김정희 문인화 최고봉 국보 제180호

채민플라워 2021. 4. 15.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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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한도 탄생부터 국가의 품으로 기증되기까지 여정

조선 후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추사 김정희의 걸작이며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국보 제180호 세한도...

* 세한도 *

(조선 후기에 화가인 추사 김정희가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답례로 그려준 그림으로 이상적의 성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함)

세한도는 조선 후기에 화가인 유사 김정희가 그린 문인화이다.

10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각 나라에서는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이 송, 원, 명과 우리나라의 조선에서는 사대부가 일본에서는 무사 계급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문화와 예술에도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는 시, 글, 그림에 능하였는데, 이들 사대부가 그림 그림을 문인화라고 하였다.

1844년 김정희가 오랜 유배 생활 중에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신의를 담아 그린 그림이다.

김정희는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구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주다 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1844년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시 대: 조선

저 작 자: 김정희

문화재지정: 국보 제 180호

발표시기: 1844년

크 기: 가로 69.2cm 세로 23cm

재 질: 종이 바탕에 수묵

소 장: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는 지난해 겨울, 소장자 손창근 씨의 기증으로 국민의 품에 돌아왔다.

그림은 길이만 15m에 달하며 두루마리 형태로 길게 펼쳐져 있다.

178년의 세월 동안 나라의 굴곡진 역사를 함께 겪어낸 세한도의 작품에 담긴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한겨울 가장 추울 때 탄생하여 기증되기까지 세한도의 여정을 따라간다.

★ 사라진 세한도, 추사 마니아로 다시 존재를 알리다

세한도는 첫 번째 소장자 이상적이 세상을 떠나고 제자에게 이어지다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기록이 사라진다.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세한도는 20여 년 후인 1930년대 조선 유일의 미술품 경매장이었던 경성미술구락부위 경매에 등장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일본인 후지츠카 치카시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최초의 추사 연구가다,

후지츠카는 자신의 환갑을 맞아 세한도이 영인본, 즉 복사본 100부를 제작하여 지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아직도 수천만 원의 가치가 매겨질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 세한도 영인본은 추사 김정희를 존경하는 마음과 세한도에 대한 감흥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 시대의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세한도

태평양전쟁이 막바질 치닫던 1944년 후지츠카 치카시는 세한도를 가지고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간다,

추사 김정희를 흠모했던 당대 최고의 서예가 손재형은 세한도를 양도받기 위해 후지츠카를 쫓아가 그를 설득했고 마침내 세한도를 받아서 고국에 돌아온다.

후지츠카가 그토록 아꼈던 세한도를 넘겨준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에겐 추사 김정희 연구자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손재형 선생과 나는 완당 (김정희)을 사숙한 동문 아닙니까

후지츠카가 세한도를 양도하며 손재형에게 한 말이다. 당시 일본에 공습이 계속되던 상황에서 그는 세한도를 지킬 여력이 없었다.

실제로 손재형이 세한도를 찾아서 귀국하고 석 달 뒤 후지츠카의 서재는 미굼의 폭격을 받고 잿더미가 된다.

기적같이 살아남게 된 세한도처럼 조선은 해방의 기적을 맞이했다.

손재형은 숨겨두었던 세한도를 가지고 독립운동가 이시영, 오세창, 정인보를 찾아갔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당시 그림을 보고서 이와 같은 발문을 적었다.

이 그림을 보니 수십 년 동안 고심에 찬 삶을 겪은 선열들이 떠올라 삼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말았다.”

나라를 잃었던 아픔과 독립운동을 했던 열사, 그리고 해방의 봄날까지, 세한도에는 시련이 담긴 여정이 세월을 담아 쌓아 새겨져 있었다.

★ 세한도의 마지막 여정

기쁨도 잠시, 세한도는 다시 한번 유람을 떠나게 된다.

현해탄을 건너 세한도를 찾아왔던 손재형은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큰 자금난을 겪게 되고 세한도는 결국 개성 출신의 사업가 손세기에게 넘어간다.

*현해탄*

대한 해협의 남쪽과 일본 규수 북서쪽 사이에 있는 바다, 우리나라와 규슈를 잇는 해상 교통로로 수심이 얕고 풍파가 심하다

평소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고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던 손세기는 사업으로 여유자금이 생겨도 허튼 데 쓰지 않고 문화재 수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실제로 손세기가 수집했던 문화재를 기증하면서 서강대학교 박물관이 탄생하기도 했다.

아버지 손세기의 대를 이어 304점의 문화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손창근은 20202월 마지막까지 품었던 세한도를 국가에 기증을 한다.

그리고 문화훈장 최고의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는다.

*금관문화훈장*

문화예술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며 5등급으로 한다.

1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은 대수로 된 정장, 부장, 약장 및 금장으로 되어 있으며, 2등급인 은관문화훈장은 중수로 된 정장, 부장, 약장 및 금장으로 되어있다.

3등급인 보관문화훈장은 중수로 된 정장, 약장 및 금장으로 되어 있다.

4등급인 옥관문화훈장과 5등급인 화관문화훈장은 소수로 된 정장, 약장 및 금장으로 되어있다.

 

세한도의 50여 년 세월을 함께한 손창근. 그는 국가의 품으로 돌아가 세한도를 다시 함전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돌고 돌아 세한도의 긴 여정이 드디어 국가의 품으로 기증되면서 마지막 여정을 끝맺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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